오래 참을 수 있는 이유 (히 6:13-20)
신앙 생활은 현실에서 쉽지 않다. 말 그대로 '믿음으로 보는' 생활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오래 참음'이 요구된다. 신앙의 선진들은 모두 '오래 참'았는데, 15절은 아브라함이 그러했음을 기록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언약을 맺으시고 난 후 그 약속하신 말씀을 곧 바로 시행하지는 않으셨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그가 육신적으로는 더 이상 완전히 소망이 없다고 여겨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어찌보면 사실 하나님께서 기다리셨던 것이다. 더욱 상호 관계로 세워 나가시기 원하셨고, 이것은 믿음이 상호 신뢰의 문제이며 관계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13절 '약속하실 때에'의 '약속하다 ἐπαγγέλλομαι'와 명사형 '약속 ἐπαγγελία (12, 15, 17절)'은 쌍방간에 이루어지는 것인데, 비슷한 말인 언약 διαθήκη covenant (마 26:28) 은 일방적인 약속으로서 '유언'을 의미하기도 한다. 절대자 하나님께서는 유한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실 때 일방적인 언약으로 시작해서 쌍방간의 약속으로 이끄신다. 14절은 이러한 언약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네가 무엇을 하면 나도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라는 말이 없이 일방적으로 '내가 분명히 너를 복주고 (있고) 복 줄 것이다 그리고 번성하게 하고 (있고) 번성하게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현재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미래에 대한 약속을 현재 살며 누리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은혜로 받은 구원을 지금도 받고 누리며 앞으로도 더욱 받고 온전히 누릴 것이다. 15절은 이러한 언약을 믿었기에 아브라함이 오래 참을 수 있었음을 말하는데, 결국에는 그 약속을 얻어 내었다.
16절에는 13절과 같은 '맹세하다 ὀμνύω'라는 말이 나오지만 그 후에 '맹세'로 번역된 단어는 모두 '서약'을 의미하는 ὅρκος이다. '언약'과 '약속'에 차이가 있듯이 '맹세'와 '서약'에도 차이가 있는데, 맹세는 혼자서 하는 것에 비해 서약은 사전에 '맹세하고 약속함'으로 되어 있어서 쌍방간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16절은 '확정'이다 라고, 또 17절은 '보증하셨 μεσιτεύω (쌍방간에 확증함)'다 라고 한다. 이 μεσιτεύω라는 말은 '중보자 (딤전 2:5)'의 어원이다.
18절은 '두 (가지) 불변 사항들'이 있다고 하는데, 이 '둘'이 뭔지 분명하지가 않다. 이 '불변 ἀμετάθετος' 이라는 단어가 17절에도 나오는데 '서약으로 보증하신 그의 조언 (혹은 법무인단 counsel)'이고, 이 counsel βουλή 이라는 말은 '독단'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하나님께서는 유일신이시지만 '단일신'은 아니시기 때문에 그 안에 어떤 복수의 서로 상의하시는 '조언단'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조언은 불변한데, 이는 '서약으로 보증'했기 때문이다. '서약'이나 '보증'은 '양방'적인 것이고 그래서 '증인'은 항상 '둘'이 필요한데, 아마도 이러한 면에서 '둘'을 말하는 것 같다. 이는 다시 말해 결코 바꿀 수 없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항들 (복수) 때문에 (en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심을 말한다. 약속이 더디 늦더라도 분명 이러한 '둘'로 확증하셨음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18-19절은 '소망'을 말하는데, 현실에서 이미 이루어졌다면 소망은 필요없다. 이 소망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그 혼의 닻'으로 비유하는데 닻이 한번 놓이면 파도가 밀려와도 배가 움직이지 않는 것 처럼 이러한 불변의 언약은 우리에게 소망이 되어 요동하지 않게 한다. 그런데 그 목적은 '휘장 안에 들어 가'는 것인데, 19-20절 말씀에 '안으로'를 의미하는 단어가 다섯번이나 쓰였다. '휘장 내부 안으로 들어 (3번)'가는 것에 대한 동사는 현재진행형 이태 여성격 단수로 되어 있어서 '우리'로 이해할 수는 없다. 앞의 '닻'과 '소망' 모두가 여성격 단수 명사이기 때문에 바로 이 '닻'과 같은 '소망'이 '현재' 휘장 내부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있음을 설명한다.
그런데 이러한 소망을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인간이신 예수께서 '그 영원 안으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이 되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신 예수께서 그러하시기 때문에 동일하게 인간인 우리들도 소망 가운데 그렇게 되고 있다. 그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다른 차원의 그 휘장 안으로 우리는 들어가고 있다.
주님, 삶이 어렵든 편하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사는 것 자체가 고난임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소망으로 인해 미래에 언약하신 것들, 그 상속을 미리 보며 누릴 수 있음을 믿습니다. 이러한 말씀이 오늘 현실이 되기 원합니다. 주님 안으로 더욱 이끌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