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공로를 단지 누리며 감사하면 충분함 (히 9:11-22)
11절은 원어에 de (그런데, 그러나)가 있어서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라고 시작한다. 앞 구절들은 옛 것 땅에 있던 장막과 그에 따른 예법을 말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르시다. 그리스도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이 창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을 통해 오셨'는데 첫째 장막이 있었고, 따라서 주님께서도 이 땅에 오실 때 '장막을 통해' 오셨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에서 '거하시매'의 원어는 '장막치시다'인데 이 말은 놀라운 것이다. 당시 성전이 있었음에도 주님께서는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장막 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구약의 핵심인 (헤롯) 성전을 부인하는 뜻으로도 들릴 수 있는 (물론 요한 복음 기록 당시 성전은 이미 모두 파괴되었을 수도 있다) 이야기다.
12절은 원어로 '그런데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통함이 아닌 자기 피를 통해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시다 영원한 대속을 찾으심' 정도로 되어있다. 주요 동사는 '들어가다'이며 '찾다'는 동사구로 되어 있는데 모두 아오리스트 시제이다. 완료형이었으면 더 이해가 쉬울텐데 아오리스트 시제를 쓴 이유는 '영원한'이라는 단어 때문일 것이다. 주님의 대속은 단 한번에 끝났지만, 시간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그 대속하심이 언제나 적용 가능하고 준비가 되어 있다. 시간 안에서 주님의 대속은 끝났지만 그 유효하심은 계속되어 영원에 이르는 것이다.
13절과 14절은 재미있는 비교를 하는데, 과거 (동사 시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는 '육체의 정결'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영을 통해 흠 없이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아오리스트)' 것이며 '너희들의 양심을 죽은 행위들에서 깨끗하게 할 것이고 (미래형)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게 (현재진행형)'함을 말한다. 과거 제사를 통해 육체는 정결하게 해봤자 일시적인 것이고 그 양심까지는 깨끗하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님의 보혈은 비록 우리의 많은 행위들이 죽은 것이지만 그에 대한 양심을 깨끗하게 할 것이고, 현재에는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주의 보혈은 능력이 있는 것이다. 주님을 따라 살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다 (고전 4:19).
15절 핵심 단어는 '죽으심'인데, 16절로 연결되며 '유언'으로 번역된 단어는 문자 그대로 '언약'이다. 그래서 '언약이 있는 데에는 언약하는 자의 (것)을 가져오기 (위해) 죽음이 필요하다' 라고 하는데, 이 '죽음' 언약하는 자의 죽음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17절에는 언약하는 자의 것으로 되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16-17절의 내용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분명한 것은 '죽음'이 필요하고 그냥 자연사나 병들어 죽는 등의 죽음이 아니라 '피를 흘리'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희생제물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고 22절은 율법에 따르면 이러한 피흘림을 통해 '거의 모두가 정결함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피를 적셔서 백성에게도 뿌리고 (19절) 장막과 기구들에게도 뿌렸는데 (21절), 피를 뿌린 것이지 그 피로 물처럼 기구들을 닦은 것은 아니다. 만일 피로 씻는다면 깨끗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 더러워졌을 것이다. 이 '정결'은 영적인 것으로 죄에 대한 정결 즉 사하심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장구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가 어떠한가를 자세히 말하기 위함이다. 주님의 공로는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심으로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다. 여기에 대해 다른 이가 또 다시 피를 흘리거나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가 전혀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럴 자격이 없다). 우리는 단지 이 사실을 믿고 의지하며 누리며 감사하기만 하면 된다.
주님, 영원한 대속을 이루신 주님의 공로는 영원히 유효함을 봅니다. 지금 오늘 저에게도 유효하고 저는 그 공로를 믿고 취합니다. 이미 이루신 주님의 대속하심을 통해 미래 저의 양심이 온전히 해방 받을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