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르기스스탄 학원의 건물 이전 문제로 돈이 필요한 가운데, 기도가 단지 '~해 주시옵소서'가 아니라 이제는 말씀을 의지해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이루소서 라는 명령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어느 사모님께서 오늘 빌 4:19를 보내 주셨는데, 그 말씀을 의지하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소서!' 라는 기도가 되었다.
     
  • 창세기에 의하면 홍수 이전에는 대기권 위에 물층이 있었고, 그것이 비처럼 땅으로 떨어지고 땅이 갈라지며 지구 내의 물이 뿜어져 올라 왔기 때문에 홍수 이전의 지구 크기는 현재 보다 약간 더 작았고 자전 속도도 조금 더 빨랐던 것 같다.
  • 절대 권력은 부패한다. 그것은 결국 절대 권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 흑연을 1500도에서 1만 기압을 가하면 다이아몬드가 된다. 죄인이 성화되는 과정도 역시 높은 온도와 압력,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이다.

  • 사탄의 도전 - 무신론, 다신론, 범신론, 삼일성부정 혹은 유일신부정, 진화론, 윤회설

    그리스도인의 반격 (승리 안에 서 있음) - 하나님의 전신갑주

    "그런즉 서서 眞理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義의 胸背를 붙이고, 平安의 福音의 豫備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防牌를 가지고 이로써 能히 惡한 者의 모든 火箭을 消滅하고, 救援의 投球와 聖靈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엡 6:14-17)"

    - 곧 진리, 의, 복음, 믿음, 구원, 말씀

    나는 전혀 거룩하지 않고 결코 거룩해질 수 없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하다, 거룩하라 하셨으니 이제 나 자신을 새로운 피조물로 여기고 모든 삶에서 거룩을 추구하게 하소서.

    (벧전 1:16, 개정)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엡 5:26, 개정)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고후 5:17, 개정)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 신약 대부분 책들이 서신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복음서들과 히브리서 (히브리서는 오히려 그 내용이 복음으로 가득하다)를 제외한 모든 책들이 서신 혹은 서신적 형태를 띠고 있는데, 계시록 역시 그 수신자들이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인 서신서이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아마도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텐데, 그러한 믿음은 추후 차세대를 위해서 여러 가지 책들을 쓸 이유가 없게 만든다.  소위 시한부 종말론에 대해 건강하지 못한 신앙 형태라 말하지만, 사실 우리의 삶 자체가 시한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주님을 믿어 영생을 누리게 되면, 그때부터 진정한 종말적 신앙을 살 수 있다.  즉 이것은 현실을 무시하거나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육에 속한 삶에 종말을 고하고, 영으로 다시 사는 거듭난 (위로부터 난) 삶을 사는 것이다.

  • 한글 성경에서 '교회'로 번역된 헬라어 ekklesia라는 단어 원어에는 대부분 정관사 the (he, ai, ton, te..)가 붙는다.  즉 그냥 '교회'가 아니라 바로 '그 교회' 즉 우주적 교회이다.  따라서 교회의 주인은 오직 주님이시며, '우리 교회' '너희 교회' '아무개 목사 교회'가 아니다.  정관사가 붙지 않는 경우는 '각 kata 교회' 또는 '너희가 교회로 모일 때', '모든 교회(고전 4:17)', 혹은 복수 '교회들 (고후 8:23, 11:8, 갈1:1)' 등이며, 고린도전서에는 특히 실제적 모임에 대해 많이 말하기 때문에 정관사 없는 단수로 기록되며 따라서 몇몇 영번역본은 church가 아닌 assembly (모임)로 번역했다 (고전 11:18, 14:19, 14:28, 14:35).  (예외: 딤전 3:15는 '그 진리'를 부각하기 위해 앞에 '교회'나 '하나님'에 대한 정관사는 빠진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서는 독특하게 '장자들의 총회 (12:23)'라는 말이 정관사 없이 나온다. 이것은 아마도 '그 교회'와는 다르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빌 4:15 같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 교회' '우리 교회'가 아닌, 바로 '그 교회'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이 공동체' 혹은 '집회'가 더 나은 표현이다.

  • 개역개정은 로마서 13:1을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번역한다.  그런데 '복종'이라고 번역된 말은 원어 hupotasso로 엡 5:24, 골 3:18, 딛 2:5, 벧전 3:1,5 등 아내가 남자에 대해 갖춰야할 것을 말하는데, 소위 '무조건 복종'이 아니라, 이 말은 자신을 '밑에 둔다'는 의미다.  즉 기독교 세계관으로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혹은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 '복종'하는 것 외에, 서로들 'hupotasso'할 것을 말한다.  세상 권세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무조건 순종하는 것도 아니고, 아내가 남편에게 역시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먼저 자신을 그 '밑에 두는' 것이다.

  •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성경에 그러한 명령은 없다.  다만 예수를 바라보라고 명한다 (히 12:2).  십자가는 우리의 앙망의 대상이 아니라 져야할 것, 따라서 그것을 지는 이에게는 바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구원의 확신은 자기 최면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깨닫고 인정할 때 따라오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구원이다.

  • 소위 '성찬' 혹은 '성만찬' 혹은 '주의 만찬'이라는 모임에서 떡에 대해 '화체설' '상징설' '임재설' 등등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그것은 '이것은 내 몸이니라 (마 26:26, 막 14:22, 눅 22:19, 고전 11:24등)' 이라는 구절의 '이것'을 '떡 (혹은 빵)'이라 해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어에서는 '이것'의 성이 중성임에 비해 '빵'은 남성형 명사이다. 보통은 앞의 것에 대해 '그것' 즉 auto로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이것 touto' 즉 중성 명사인 '몸'을 가리키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물질적인 그 '빵'에 중심을 두신 것이 아니라 그 모임 혹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리키신 것이 확실하다. 

  • 참된 경배는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해야 하는데 (요 4:24), 이 '진리'라는 말은 Aletheia로 정관사가 붙을 때면 '진리' 즉 영적이고 성경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학문적인 것을 포함하는 용어이지만, 정관사가 없을 때는 '현실' 혹은 '실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예배'를 통해서가 아니라 실은 '삶'을 통해서이며, 그것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영 안'에서인 동시에 그것과는 또 다르게 생각되어지는 '현실' 즉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실 가장 영적인 것이 가장 실체적 혹은 실재적이며, 현실은 그 영에 반응하는 그 결과이다.

  • 신약에 '사랑하라'는 직접 명령형은 세번 나오는 반면, '두려워 말라'에 대한 직접적 명령은 11번 φοβεῖσθε  13번 φοβοῦ 등이다.

  •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은 능력있는 사람이다.  필요한 일을 하는 이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주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고, 주님과 동행함을 배우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

  • 계 4:5 에는 '하나님의 일곱 영들'이 나온다. 이 '일곱 영들'은 마 12:45에도 나오는데, 마지막 때에 더러운 영들이 강하게 역사할 것을 말씀하고,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도 성도들이 충분히 대적할 수 있도록 동일하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일곱 영들'을 보내신다.

  • 천년 왕국이 시작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과거 성도들이 부활한다. (마 8:11)

  • 행 1:8의 '땅 끝까지 이르러"의 '땅끝'은 문자적으로 동일한 언급이 마 12:42의 남방여왕에도 나온다.  시바 혹은 이디오피아 일텐데, 이곳이 주님 말씀하신 '땅 끝'일까?

  • 목사는 한자로 師이다.  이 '사'는 '선비 사'가 아니라 '스승 사'자 즉 교사 牧師 나 의사醫師 에도 쓰이는 말인데, 그래서 '의사 선생'이라고 부른다.  대사 大使의 '사'는 '보낼 사' 즉 '사도' '사명' 등에 쓰이는 '사'이고, 변호사 辯護士 혹은 박사士의 사가 바로 '선비 사'이고, 옳은 일은 한 사람인 의사士 라는 말에도 쓰인다.  판사事나 이사事의 사는 '일 사'이다.  즉 이들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즉 목사라는 말은 원어에 '목자와 교사'로 같이 붙어 있는 말이고, 따라서 목양하며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해서 박사학위가 있다해도, 성도들을 목양하는 사람은 자신을 선비의 위치에 두지 않고 다만 목양하고 가르치는 위치에 놓는다. (사실 선비 라는 말은 좋은 말이기는 하다)

  • 기원전 1200년을 기해서 수세기 동안 찬란했던 미케네 문명과 히타이트 문명이 갑자기 사라진다. 이때는 소돔과 고모라의 사건 시대 배경과 비슷한데, 역사학자들은 그들이 사라진 이유를 모르지만 아마도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 아닐까?  다만 소돔 가까이 작은 도시 소알은 그 심판을 피한다. 고고학적으로 당시 살아남은 지역인 소알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 집사란? - 원어 diakonos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한글 성경 여러 곳에서 '일꾼, 종, 섬기는 자, 하인' 등으로 번역되었다.  '통하여' 혹은 '철저히'를 의미하는 dia와 '먼지'를 의미하는 konis의 합성어인데, 따라서 '먼지를 일으킬 정도로 바쁘게 돌아다니며 일을 하는 자'라는 뜻이다.  한자어는 執事라고 쓰며 '잡을 집, 일 사' 즉 일을 (하기 위해 무언가를) 잡는 사람, 일을 맡아 다스리거나 처리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보통 '하인'이라고 하면 종을 의미하지만 이 '집사'는 어느 정도 권위가 있어서 그가 섬기는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하며 재정까지 맡아 관리하기도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나이 30이 넘으면 보통 집사의 직분을 주거나 아니면 호칭으로 '아무개 집사님'이라고 부르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원래 어느 한 교회에서 집사가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남자만 5천명이 넘는 큰 교회로 성장했지만 (행 4:4) 집사는 고작 일곱이었고, 그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들이었다 (행 6:3).  딤전 3:12에는 집사의 자격으로 '한 아내의 남편'이라고 하는데, 이 구절에 따르면 교회 내에서 오직 남자만 집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롬 16:1은 '뵈뵈'를 언급하며 여자인 그녀를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라고 말한다.  성경에 단 한번 여자가 집사로 일컬어진 경우인데, 단순히 섬기는 종이 아니라 '교회의 집사' 즉 한 교회를 대표하는 담임 목사격 정도로 보아진다.  기본적인 원리는 남자가 집사를 해야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이방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필요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여자가 교회를 섬기게 되는 경우도 가끔은 가능한 것을 알 수 있다.

  • 성경적 '하나'의 개념 - 성경에서 '하나'라는 말은 수적 개념도 있지만 적지 않은 경우 '동일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0:30)'고 하셨는데, 원어 heis라는 말은 형용사 단수격인데, '이니라'는 복수로 되어 있다.  즉 아버지와 주님 당신 자신이 숫적으로 단수 하나가 아니라 '연합' 혹은 '같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이에 따라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3절)'고 답한다. 고전 10:17은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 기록하는데, 여기 '하나'도 동일한 단어이다. 생각해 보면 참여자가 많아지면 하나의 빵 덩어리로 성찬을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고, 더욱이 초대 예루살렘 교회나 그 후 여러 이방에 세워진 교회들은 많은 경우 집에서 모였고 그 모이는 장소들도 여러 곳이었으며 따라서 나누는 빵 역시 숫자적으로는 하나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이 다수의 장소에서 각기 다른 시각에 행해지는 성찬 혹은 주의 만찬에 대해 '빵이 하나'라고 했다.  그것은 마치 여러 교회들이 있지만 그들은 우주적으로 하나 즉 주님의 몸으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동일한 생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개역개정역은 성령, 주,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한 분'이라고 엡 4:4-6에 계속해서 오역했는데, 원어에는 '분'이라는 말이 없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 말씀에 불법적으로 추가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 하나이시다.

  •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기는 방법 - '주일성수'와 '주일예배'라는 개념을 버리면 된다! 요즘 코바로 인해 작은 교회는 전혀 모이지 못하거나 중대형 교회는 모이는 곳이 있어도 극소수만 모인다고 한다.  그 이유는 소위 '대예배' '주일' '예배당'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대에는 주일이 휴일이 아니었고 따라서 낮에 모일 수 없었다.  주일이 휴일이 된 것은 역사적으로 그리 길지 않으며 더우기 비서구권에서는 아예 휴일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교회가 살기 위해 혹은 더 큰 부흥을 위해 10-20명 작은 모임의 집회 (예배)로 전환되어야 한다.  더욱 친밀하고 풍성한 모임이 될 것이다.  과거 구약의 제사나 천주교의 의식에서 제발 개혁하자!

  • 선악지식의 나무는 마귀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이다.  선악지식 나무에 대해 하와에게 다른 짐승이 아닌 뱀의 모습으로 마귀가 유혹했던 것을 주목하라! 하지만 마귀는 이를 무시했고 오히려 인간을 유혹하여 타락하게 했다.

  • 개정역은 히 1:2를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라고 하는데, '통하여'라는 말은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 라는 의미이며 그렇게 번역하면 오직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 되지만 원어에는 아들 '안에서'로 되어 있고 이것은 누구든지 아들 '안에' 있으면 하나님 말씀을 전하거나 선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하신 말씀 외에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말씀을 전하며 복음서나 서신서를 쓸 수 있었다.  불교에서는 이제까지 쓰여진 불경 모두를 번역만 하는 것에도 약 400년이 소요될 것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불경은 석가모니가 설파한 것이 아니고 그 후에 등장하는 많은 고승들의 기록을 포함한다.  만일 기독교에 똑같이 적용한다면 기독교 내의 모든 서적들과 설교들만 해도 번역하는데 수 천년은 걸릴 것이다.

  • 성경에 '날'은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는 창세기 1:5에 의하면 빛이 있는 동안의 시간이지만, '첫째 날'은 '저녁'으로 시작해서 '아침이 되니' 라고 기록하며 오히려 밤을 '날'이라고 한다.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소위 '창조'의 시작은 '아침'이겠지만 창세기의 첫째날이 '저녁'으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아침'은 있었고 따라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성경 찬송 번역' 메뉴에서 창세기 1장을 참조하기 바람). 그래서 3절 부터의 기록은 '창조'가 아니라 '만드신'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안식일'에 관한 것으로, 보통 토요일을 안식일로 생각하지만, 원래 '일'이라는 말이 없이 '안식 샤바트'이고, 시간 역시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오후 늦게까지의 시간이기 때문에 초대교회 모였던 집회는 토요일 저녁 시간이 아니었을까 한다.

  • 신약에서 '사랑(아가파오)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은 '원수를 사랑하'라 (마 5:44, 눅 6:27, 눅 6:35)와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벧전 1:22) 단 두 곳 뿐이다.  다른 곳은 원어로 미래형 아니면 가정형으로 되어 있다.  요21장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 라고 두번 물으셨고 마지막은 '나를 (친구처럼) 좋아하느냐 (삘레오)'라고 물으셨는데, 처음 물음 역시 직접적인 것이지만 명령은 아니다.

  • 요 10:9을 개정역은 '내가 곧 문이니 누구든지 나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 들어가고 나오며 꼴을 얻으이라'로 번역했는데,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자면 '나는 문이다 나를 통해 만일 누구든 들어오면 구원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들어올 것이고 나올 것이다 그리고 꼴을 얻을 것이다'로 되어 있다.  즉 '가다 (포류오마이)' 라는 말 대신에 모두 '오다 (에르코마이)'로 되어 있는데, 들어(에이스)오고 나(에크)오다는 말이다.  이것은 주님 안으로 혹은 밖으로가 아니라 주님께서 바로 '그 문'이시기에 그를 통해 출입하는 사람은 구원되어질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 말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시 28:6)'과 연결되는데, 구약의 단어들 역시 '가다'와 '오다'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그 동일한 복, 아니 어쩌면 더욱 큰 복이 진정한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들어오고 나오면 그 목적은 아버지께로 오는 것이다 (요 14:6). 

  • 개정역 마 12:35은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하는데, 원어에 없는 '쌓다'라는 말을 추가했기 때문에 마치 '적선' 혹은 '적악' 즉 자신이 살면서 '쌓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킹제임스 흠정역은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보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보고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원어에 맞게 번역했는데, 같은 내용의 눅 6:45도 마찬가지다. 죄인은 그 안의 보고가 죄이기에 죄들을 낼 수 밖에 없지만, 주님을 믿는 주의 백성은 자신의 그 죄들과 추함을 토해내는 그 보고 즉 자아에 십자가를 적용하고 대신 주님의 생명과 영을 취하고 소유함으로 선한 것을 낼 수 있다.

  • 하나님이 있다면 왜 주위에 나쁜 일들이 발생하는가 라고 묻는 이들이 적지 않다.  혹은 하나님은 왜 지옥 가는 이들을 만드셨는가 라고도 질문한다.  결국 '주위'나 다른 이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이 힘든 것을 토로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 그 근본 원인을 알려하지 않고 불평만 한다.  사람들이 힘들고 만족이 없는 것은 먼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소위 '원죄'이고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악'이 발생함을 허용하심으로 인생들로 겸허함으로 하나님을 찾게 하셨다.  삶의 부조리나 실존의 고통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계신 것을 증명한다.

  • 소위 '수요와 공급'이라는 말은 시장의 원리를 말하는데, 이것 역시 잘못된 번역이다.  영어로는 'Supply and Demand'이며 '수요'보다는 '공급'이 먼저 나온다.  그래서 '공급과 요구'라고 해야 하는데, 사실 '수요'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자본주의나 시장경제의 원리가 아니라 공산주의에 가깝다.  시장 경제는 그 요구를 정확히 알지 못해도 우선은 공급을 먼저하는 것이고, 그에 대해 얼마나 요구가 따르는지, 그리고 거기에 대해 가격이 맞춰지는 것이 원래의 개념이다.  그래서 가끔 자원이나 인건비가 남용되거나 허비될 수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공산주의적 배급을 위한 생산이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더욱 자원을 남용한다.  이렇게 '공급'을 먼저 말하는 것은 은혜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수학적이고 계산적인 것을 초월해서 무한한 공급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상상할 수 없는 온 우주를 지으셨고, 이것은 무한한 공급이며, 바로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스케일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이시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경험하게 하는 분이시다.  그분은 먼저 죄를 다 해결했으니 나아오라 하신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알기도 전에 이미 이 무한한 은혜가 주어졌다.  먼저 공급하셨다!  이제 그 공급에 대해 우리가 요구하며 얻고 누리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 진화론의 허구 - DNA는 종 간에 바뀔 수 없다, 엔트로피가 높아지는 것 즉 모든 것이 질서에서 무질서로 간다는 사실은 증명되었으며 이는 진화론이 기본부터 허구임을 증명한다.

  •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증인의 삶을 살지 않기 혹은 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능력을 주시는데 이 능력은 기본적으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한 능력이다. 주님을 증거하며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함이다.

  • 성경을 읽을 때 두가지 기본 가이드라인이 있는데, 성경 말씀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이방인 혹은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 차이를 알아야 하는 것과 또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쓰인 것인지 아니면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할 것인지 아는 것이 필요하다.

  • 구원의 확신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왕국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받는다.

  • 아가페 사랑에는 그 어떠함이 있고 또 그에 따른 열매가 있는데, 고전 13장은 그 어떠함을 말씀하고, 갈 5:22-23 성령의 열매는 단수로서 '아가페'의 8가지 모습을 말한다. 첫째 어떠함은 '오래 참음' 즉 원어적 의미로는 '긴 고난'이 있고, 그에 따른 첫째 열매가 바로 '기쁨'이다.

  • 유대인들이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어서 로마 권력에게 허락을 받아 주님을 십자가형 집행했다는 것은 그들의 거짓이며 변명이다.  후에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써 주님은 예언을 이루셨다.